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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제국 체제를 확립시키고 판도를 넓힌 황제: 악바르 대제(Akbar)

by 호박달빛 2011. 7. 9.

 출처  네이버 > 인물과 역사 >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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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19세기 중엽 인도를 통치한 무굴제국의 기틀은 3대 악바르 황제 시대에 갖추어졌다. 악바르는 정복 전쟁으로 제국을 확장시킨 것은 물론, 종교적 관용을 실천하고 문예를 장려하며 제국 통합을 위한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다. 악바르는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로도 일컬어진다. 악바르는 ‘위대하다’는 뜻이니 ‘위대하고 또 위대한 황제’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취약한 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황제권 확보

무굴제국은 그 건국자 바부르와 2대 황제 후마윤에 이어 악바르 시대에 대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초창기 제국의 기반은 취약했다. 1540년 후마윤은 아프간계 수르왕조셰르 샤에게 패해 나라를 빼앗기고 동생에게도 배신당해 유랑하는 처지가 됐다.

 

악바르는 한 살이 조금 넘은 시절부터 아버지와 헤어져 무사들 사이에서 길러졌다. 후마윤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의 지원으로 15년 만인 1555년 델리를 되찾았지만, 이듬해 1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악바르가 13살 나이에 즉위하자 1556년 10월 수르족이 침공해왔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제국을 구한 것은 후마윤의 친구이자 악바르의 섭정(攝政) 바이람칸이었다. 바이람칸은 수르족과 결전을 벌여 그 장군을 사로잡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4년 동안 바이람칸은 제국의 영토를 넓히며 무굴제국의 실권자로 활약했다.


  

바이람칸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이제 18살이 된 악바르는 그를 숙청하려 했다. 바이람칸이 시아파 무슬림을 중용하자 반대파가 늘어난 것도 악바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1560년 악바르는 바이람칸을 추방하고 그 측근들을 제거하여 온전한 황제권을 확보했다.

 

 

정복 전쟁으로 제국의 판도 확장

13살의 젊은 황제 악바르가 첫 칙령을 내리는 모습.
오른쪽에 체포 당하는 신하가 보인다. 악바르의 아버지
후마윤이 총애했던 신하다([악바르나마]의 삽화)


권력 기반을 다진 악바르는 정복 전쟁과 회유책을 동시에 펼치며 제국 확장에 나섰다.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말와(중앙 인도의 서부 말와 고원 지대)를 정복하고(1561), 아리안계 힌두교도들인 라지푸트족에 대해서는 혼인 정책으로 회유하여 무굴제국의 영향권 안에 두었다. 악바르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공납을 바치며 병력을 제공하는 수장에게는 혼인 동맹과 함께 영지 소유권을 보장해주었지만, 반항하는 수장은 패망시켰다. 예컨대 8세기부터 라지푸트족이 세운 토후국의 수도였던 치토르의 주민들은 악바르의 군대에 학살당했다. 1570년대 초에 악바르는 라지푸트족 토후국들 대부분을 제국의 영역으로 병합시켰다.

 

1573년 악바르는 구자라트(인도 서부)를 정복하고 1576년에는 벵골 지방(인도 북동부)을 병합시켰다. 이후에도 악바르의 군대는 1586년 카슈미르(인도 북서부), 1591년 신드(인더스강 하류), 1595년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 남부) 등을 정복했다. 1600년대 초 악바르의 군대는 예로부터 남북 인도의 정치적, 문화적 경계이자 장벽이었던 빈디아 산맥 남쪽으로도 진군하여 데칸 지역을 침공, 제국의 영역을 더욱 넓혔다. 무굴제국 군사력의 강점은 포병의 화력과 기병의 기동력에 있었다.

 

악바르는 운반과 분해 조립이 쉬운 대포를 제작해 사용했고 한 번에 여러 대의 대포를 동시 발사하는 기술도 사용했으며, 공성전(攻城戰)에서는 폭약도 자주 사용했다. 또한 칭기즈칸티무르의 후예임을 자처한 무굴제국의 기병은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하곤 했다.

 

 

광대한 제국의 통합을 위한 새로운 정책

악바르는 중앙아시아의 부족제에 기반을 둔 병력과 힌두교 토착 병력을 합치고, 지배층과 군대를 만사브다르로 불리는 체계로 재조직했다. 지배층은 33단계의 만사브 가운데 하나에 배속되었다. 1600년경 만사브는 1,600명 정도였으며 능력과 공적에 따라 보다 높은 만사브를 단계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7천에서 1만 명 사이의 병력을 거느리는 최고위 만사브들은 대부분 황족들이었다. 제국의 상비군은 소규모였지만 만사브다르 체계를 통해 안정적으로 병력을 충원했다. 각 만사브들은 일정 숫자의 기사(騎士)들을 유지해야 했고, 특히 말의 숫자는 병력의 몇 배 이상이어야 했다. 악바르는 정기적으로 병력과 말의 수준을 점검했고, 말은 아라비아종의 우수한 말만 기르도록 했다.

 

악바르의 통치 시스템은 기능에 따라 분화된 중앙집권체제였다. 궁정 귀족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한 군사 장관은 정보 수집 역할도 맡았다. 사법 장관은 종교 문제도 담당했다.
악바르는 정복지에 자율권을 폭넓게 부여했던 이전 군주들과 달리 일원화된 중앙집권체제를 관철시켰고, 정복지 수장들에게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자격과 함께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보장하여 궁정에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무슬림이 아닌 이교도에게 징수하던 세금을 폐지하여 비(非)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 이러한 정책은 라지푸트 지역의 힌두교도 왕들을 우대하고 군사나 행정 분야 고위직에 중용한 것과 맞물려 있다. 요컨대 광대한 제국의 통합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것이다.

 

악바르는 백성들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드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예컨대 그는 일부러 매일 일정 시각에 궁정 창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백성들은 악바르의 그런 모습을 보며 환호하고 경의를 표했다.
지고(至高)의 존재인 황제가 매일 백성들 앞에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하는 자애로운 황제의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


아불 파즐 이븐 무바라크가 페르시아어로 쓴
악바르 대제의 공식 전기이자 역사서
[악바르나마(악바르의 책)]를
악바르 대제에게 헌상하고 있다.

 

문화를 흥성시키고 종교적 관용 실천


악바르는 무척이나 다재다능했다. 황제이면서도 예술가, 전사(戰士), 장인(匠人), 목수, 발명가, 동물 사육사, 신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제분기와 운송 마차 기능을 겸하는 제분(製粉) 마차를 직접 발명하는가 하면, 형광물질을 바른 공을 고안해 내 밤에도 공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어릴 때 문예를 익히지는 못했지만 그림을 직접 그릴 정도로 예술을 애호했다.
악바르는 산스크리트 고전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장려했고, 신하들에게 문헌 사본을 하사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유럽의 회화 작품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궁정 화가들은 페르시아와 인도 양식에 투시적 원근법을 도입한 사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림, 즉 무굴회화를 발전시켰다.

 

델리로 옮기기 전까지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 북쪽에 있는 악바르 대제의 무덤(1613년 완공).
4개의 입구가 각각 다른 종교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설계되어 악바르 대제의 종교적 관용을 나타낸다.

 

악바르는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뭇 사람들을 압도하는 강건한 인상을 풍겼으며, 많은 전투에서 앞장서 싸움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 처럼 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섰다”는 평판을 얻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때에 따라 자비와 무자비를 보여주었다.
반란을 꾀한 황족을 용서할 때도 있었지만, 잔인하게 죽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 관용에서 악바르는 크게 열린 태도를 취했다. 악바르의 후계자 자항기르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의 제국에서 모든 종교적 신조들과 모든 계층 사람들이 숨 쉴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종교의 신학자들이 만났고, 수니 무슬림시아 무슬림이 하나의 모스크에서 만났으며, 프랑크족(서유럽인)과 유대인들이 하나의 교회에서 만났고, 각자의 신앙을 준수할 수 있었다.”

 

악바르의 치세에 종교간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었다. 그 자신이 직접 예수회 선교사들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 열성적으로 토론했고, 궁정의 이슬람 신학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중재하는 역할도 했다. 그는 기독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다양한 무슬림 종파들, 파르시(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히 신비주의를 중시했다.
악바르는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절충적, 혼합적 종교사상인 ‘신성한 믿음’(딘일라히)을 직접 창시하기도 했다.

 

아들의 반란과 손자의 반란


악바르의 말년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600년 악바르가 원정을 나간 사이 아들 살림이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던 것이다.
악바르는 살림의 아들, 즉 손자 미르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고 살림은 이에 대해 반항하고 나선 것이다. 악바르는 급히 돌아와 살림의 사실상 반란을 무마시켰지만, 후계 구도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1605년 세상을 떠났다.
살림이 즉위하여 제4대 황제 자항기르가 됐지만, 이번에는 자항기르의 아들 미르자가 악바르의 뜻을 내세우며 1606년 반란을 일으켰다. 자항기르는 반란을 진압하고 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추방했다. 황위 계승을 둘러 싼 우여곡절과 비극이 있었지만 악바르부터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는 150년 동안(1556~ 1707)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