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르는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뭇 사람들을 압도하는 강건한 인상을 풍겼으며, 많은 전투에서 앞장서 싸움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 처럼 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섰다”는 평판을 얻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때에 따라 자비와 무자비를 보여주었다.
반란을 꾀한 황족을 용서할 때도 있었지만, 잔인하게 죽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 관용에서 악바르는 크게 열린 태도를 취했다. 악바르의 후계자 자항기르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의 제국에서 모든 종교적 신조들과 모든 계층 사람들이 숨 쉴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종교의 신학자들이 만났고, 수니 무슬림과 시아 무슬림이 하나의 모스크에서 만났으며, 프랑크족(서유럽인)과 유대인들이 하나의 교회에서 만났고, 각자의 신앙을 준수할 수 있었다.”
악바르의 치세에 종교간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었다. 그 자신이 직접 예수회 선교사들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 열성적으로 토론했고, 궁정의 이슬람 신학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중재하는 역할도 했다. 그는 기독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다양한 무슬림 종파들, 파르시(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히 신비주의를 중시했다.
악바르는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절충적, 혼합적 종교사상인 ‘신성한 믿음’(딘일라히)을 직접 창시하기도 했다.
아들의 반란과 손자의 반란
악바르의 말년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600년 악바르가 원정을 나간 사이 아들 살림이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던 것이다.
악바르는 살림의 아들, 즉 손자 미르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고 살림은 이에 대해 반항하고 나선 것이다. 악바르는 급히 돌아와 살림의 사실상 반란을 무마시켰지만, 후계 구도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1605년 세상을 떠났다.
살림이 즉위하여 제4대 황제 자항기르가 됐지만, 이번에는 자항기르의 아들 미르자가 악바르의 뜻을 내세우며 1606년 반란을 일으켰다. 자항기르는 반란을 진압하고 아들의 눈을 멀게 하여 추방했다. 황위 계승을 둘러 싼 우여곡절과 비극이 있었지만 악바르부터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는 150년 동안(1556~ 1707)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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