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 상품 광고를 보면 보름 동안 유럽 완전 정복, 10일간 북미일주, 무박 3일 동경여행 뭐 이런 ‘무한도전’스러운 광고들이 종종 눈에 띈다. ‘기왕 떠나는 해외여행이니까 많이 휩쓸어야지’라는 일념으로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종횡무진. 저녁이면 물집 잡힌 발가락을 눈물로 어루만지며 또 야간열차 타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 ‘천리행군도 문제없다’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셋... 에너지 넘쳐흐르는 청춘들에게 빡센 일정쯤이야 보람찬 여행의 감초 정도로 느껴질 테니 내일도 힘껏 달려보자, 청춘이여!
목 빠지게 기다린 해외여행이니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보람은 있을지언정 기대했던 여유, 낭만, 휴식과는 거리가 좀 멀다. 특히 순도 높게 짜인 패키지 여행은 질질 끌려다니거나 본전 아까워서라도 어쩔 수 없이 강행군을 한다 쳐도, 말 그대로 자유여행이라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여기서 여행자의 하루 행동 패턴을 몇 가지로 나누어보겠다. 종종 이런 도식화에 본능적 거부반응을 보이며 혈압 올리시는 분들 계신데 지혜로운 독자들은 다 안다. 이해를 돕기 위한 구분일 뿐 모든 여행자를 몇 가지 유형으로 단순화시킬 수도 없고 제시한 유형들 사이에 우열 따위도 없다는 사실을.
여행자의 하루 일정을 함량별로 구분해보겠다. 참고로! 난이도 별 한 개는 덕수궁 관람 수준의 소요 시간 및 정신적·육체적 피로감(물론 개인적 편차 있다) 정도를 의미한다. 이동은 한 시간 이내, 전체 일정 약 두세 시간 소요, 도보는 4킬로미터 이하. 국제 공인 규격이 아닌 저자의 경험으로 정한 임의 규격임을 미리 말해둔다.
특징 주로 15일 이내의 단기여행에서 등장하는 패턴. 엄청 피곤하지만 여행의 보람을 만끽한다. 바쁜 일정을 쪼개고 쪼개 여행 온 사람들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장점 여행하고 돌아와서 늘어놓을 이야기가 많다. 시야가 매우 ‘글로벌’해진 것 같은 착시 현상 발생하나 곧 정상을 되찾는다.
단점 잘못하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못 알아볼 수 있다. 수면 부족으로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동반하며 단기 다이어트에 악용되기도 한다.
특징 대체적으로 무난한 여행 패턴. 적당한 긴장과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전날 밤 음주가무를 즐겼다면 오전 일정은 생략한다.
장점 여행을 제대로 즐기고 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나름 여유도 생겨 주변 여행자들에게 훈수를 두는 수준이다.
단점 HRMMS증후군의 감염과 발병을 주의해야 하며 방치하면 여행 권태와 무기력증으로 전이된다.
*HRMMS증후군 Hotel-Restaurant-Monument-Museum-Shop의 다섯 가지 머릿글자에서 따온 말. 호텔과 식당, 명소, 박물관, 쇼핑 등 5개 영역을 순례하는 여행자 행동양식 (출처: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김재기 지음)
특징 3개월 이상 장기 여행자에게 나타나기 쉬운 패턴. 여행이 슬슬 권태로워져 주로 숙소와 그 주변에 출몰한다. 여행자들끼리 몰려다니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경향이 자주 보고된다.
장점 여행과 삶의 구분이 점차 흐릿해진다. 주변 사람의 여행에 개입하려고 애쓰나 잘난 척한다고 오해 받을 소지가 있다.
단점 가끔 향수병 증세를 보이기도 하나 귀국하면 다시 떠날 궁리만 한다. 여행 중독 초기 증세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