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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중국。ChiNa

오래된 모더니티, 상하이

by 호박달빛 2011. 8. 11.
 


기이한 모더니티의 스카이라인 - 와이탄의 아르데코 빌딩들

지금 상하이는 세계가 놀라워하는 미래도시다. 포동 지구는 개방 중국을 대표하며 하늘을 꿰뚫는 첨단 비즈니스 빌딩들을 쭉쭉 뽑아내고 있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보이는 와이탄(外灘, The Bund)의 스카이라인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왜 저기에 20세기 초반의 아르데코 건물들이 떼거지로 앉아 있는 걸까? 

19세기에는 작은 어항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강제 개항 이후 갑자기 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다. 1930년대 100만으로 증가한 인구 중에 토박이는 15~25%에 불과했으니, 외국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인 진정한 국제도시였다. 당시 세계를 휩쓸던 모더니즘과 소비 도시의 비전은 중국의 열정과 만나 독특하고 활기 넘치는 거리를 만들었다. 특히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온 열강들이 앞다투어 호텔, 영화관, 백화점 등을 지어댄 곳이 와이탄 거리. 그 시대 세계의 문화 수도는 물론 파리였다.
그러나 와이탄은 파리이자 뉴욕이고 베를린이자 산 페테르스부르그였다. 

 

신여성과 댄디보이 - 뚜어룬루의 카페


“유명해질 거라면 서둘러야 해. 너무 늦으면 즐거움도 그리 크지 않을 거야. ... 어서, 어서, 늦으면 안돼, 안돼.” 23세에 상하이 문단의 인기 작가가 된
장아이링(張愛玲: [색,계]의 원작자이기도 하다)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첫 원고료를 받아 백화점에 립스틱을 사러 간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어설프게 댄디보이를 흉내 내는 남자들이 아니라 치파오를 입은 신여성들이 상하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중국 여성을 대표하는 의상이 된 치파오는 바로 이 시대의 발명품이다. 원래 만주족 여성들이 입던 옷을 몸에 딱 붙게 하고 치마 길이를 짧게 만들어 활동적이면서도 섹시하게 변형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 시대 문명의 총아는 ‘카페’였다. 소설가와 지식인들은 '설리번’에서 초콜릿을, ‘페데랄’에서 케이크를, ‘콘스탄틴’에서 아랍식 블랙커피를, ‘리틀 맨’에서 아름다운 웨이트리스를 즐겼다. 지금 모던보이들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뚜어룬루(Duo Lun Lu)가 그럴 듯해 보인다. 1920~30년대 상하이의 도시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 사이로 고풍스러운 카페들을 만날 수 있다. 


 

               1930년대 광고에 등장한 상하이의 여성
               치파오의 영광이 시작된 때다.



영화는 현대의 빛 - 상해 영화 촬영소


[야초한화]에서 롼링위와 호흡을 맞춘 원조 한류 스타, 김염




 


“오데온은 동양 최대의 넓이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전당입니다. 중국 최고의 영상만을 당신에게 제공합니다.”
1930년대 <양우>라는 잡지에 게재된 상하이 오데온 극장의 홍보문구다. 그런데 오데온은 상하이에 12개나 있던 서구식 영화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체코의 건축가 라디슬라우스 후덱이 설계해 1933년에 개장한 그랜드(大光明) 영화관은 2천 개의 소파식 좌석에 에어컨을 설치했고 동시통역용 이어폰도 구비해 두었다.

황금기 상하이 문화를 대표하는 단어는 ‘영화’다. 1927년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유성 영화는 바로 이듬해 상하이를 찾아왔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상하이 영화는 이 도시의 특산품이었고, 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문화인인 루쉰, 장아이링 등도 영화광이었고, <영롱부녀도화잡지> 등 쏟아지는 영화잡지를 읽지 않으면 교양인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최전성기에 자살해 전설이 된 롼링위(阮玲玉)을 비롯해 당시 영화 스타들의 대부분은 '신여성'을 대변하는 여배우들이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남성 스타가 있었으니, 바로 김염. 서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이 시대를 휘어잡은 원조 한류스타다. 그의 인기는 1934년 영화잡지 <전성>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세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지금 상하이 서남쪽 외곽에 대형 영화 촬영소(影视乐园)가 있는데, 1930년대 상해 거리를 재현해놓은 대규모 세트장이다. 당시의 여러 건물과 전차들을 볼 수 있고, [상해탄]이라는 공연도 만날 수 있다.  

 

항일과 혁명의 핏자국들 - 루쉰 공원


상하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적 규모의 도시가 된 데에는,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열강들의 각축이 큰 역할을 했다. 당연한 결과로 이 도시는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여러 세력들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영화 [
아나키스트], [색,계] 등 이 시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들에서 혁명가, 테러리스트, 스파이들이 벌이는 쟁투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상하이의 여러 서구식 건물, 공원, 경마장들은 일반 중국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오직 외국인들과 극소수의 지배층을 위한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홍커우 축구장 옆의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는 '중국인과 개는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가 붙어 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실제 표지판은 없었지만, 개와 자전거, 외국인의 시종이 아닌 중국인, 양복과 고급 의상을 입지 않은 일본인과 인도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이 공원은 이후에 개방되어 상하이 시민들의 위락시설이 되었는데,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 역사적 의거의 현장이다. 현재 홍커우 공원은 루쉰 공원(魯迅公園)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아큐정전] 등의 소설과 에세이로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 루쉰(魯迅)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루쉰은 식민지 시대 상하이 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지금도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다.

 

백 가지 쾌락의 댄스홀과 재즈 클럽 - 바이러먼

와이탄 강변의 피스 호텔(Peace Hotel)
출처: wikipedia(Ruazn2)

 


번쩍이는 네온 불빛에 물들어 잠들지 못하는 상하이. 그 밤의 주인공은 카바레, 댄스홀, 그리고 재즈 클럽들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태어난 재즈 음악은 곧바로 이 도시로 날아왔고, 서양식 정장을 걸친 외국인들과 중국식 장삼을 걸친 부유층들은 치파오를 입은 여인들과 사교댄스를 즐겼다. 캐세이 호텔, 비너스 카페, 비엔나 가든 댄스홀 등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밤의 클럽들은 넘쳐났는데, 이들은 매력적인 중국식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파라마운트(Paramount)'를 개명한 '바이러먼(百樂門)'으로, 지금도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오랜 전통의 상하이 재즈는 오늘날에도 그 명성을 저버리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온 뛰어난 연주자들을 여러 클럽에서 만날 수 있는데, 올드 상하이의 고전적인 사운드를 찾는 사람들은 와이탄 강변의 피스 호텔(Peace Hotel)로 간다. 70세가 넘는 노연주자들로 구성된 밴드로 유명한데, 정통 재즈라기보다는 스윙이 사라진 중국화된 연주 스타일이라고 한다.


사이공 마피아 - 두웨성의 옛 저택


돈과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들끓는 메트로폴리스. 당연히 거기에는 온갖 범죄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영국이 중국인들을 타락시킨 아편의 본거지도 이곳이었다. 두웨성(杜月笙)은 이 시대 상하이 암흑가를 지배했던 자로, 그 다채로운 행적으로 인해 어두운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그의 조직 청방(靑幇)은 매춘, 도박, 아편으로 대표되는 밤의 경제를 지배했고, 막강한 조직력과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실권과 명예에 도전했다. 1927년
장개석의 반공 쿠데타에 일익을 담당했고,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주선하기도 했다. 일본의 지배 뒤에는 부역을 거부하고 홍콩으로 탈출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분명히 했는데, 이는 일제의 항복 뒤에 국민당과 공상당 양쪽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애쓰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두웨성은 어느 체제도 선택하지 않고 쓸쓸하게 죽어갔지만, 그의 저택은 상하이의 명물이 되어 있다. 푸시(浦西) 신르루(新樂路)에 있는 부티크 호텔 '수석공관'이 바로 그곳으로,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 안에 구식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보스가 사용하던 권총, 시거, 시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백주대낮에 총질을 하며 혁명가들을 참살하던 행적조차 노스탤지어가 되고 있다.  


 

[상하이 트라이어드]는 14살 소년의 눈으로 1930년대 상하이 암흑가를 들여다본다.

 

공장과 도살장의 새로운 운명 - M50 예술촌과 1933 라오창팡

 
옛 외국인 도살장을 개조한 1933 라오창팡



상하이가 오랜 암흑의 시간을 보낸 덕분일까? 도시 곳곳에는 20세기 초반의 건물들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데, 개방의 물결을 통해 이들도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다.

모간산루 50번지는 1930년대에 지어진 공장들이 1999년에 문을 닫으면서 흉물스럽게 비어 버릴 운명을 맞이했다. 다행히도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이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기 시작했다. 백여 개의 스튜디오, 갤러리, 각종 예술 관련 사무소들이 들어선 'M50 예술촌'은 상하이는 물론 전 세계 예술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상하이 미술 특유의 대량 생산품 느낌의 거대한 설치 작품들도 이런 환경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여겨진다. 

하이룬루(海伦路)역 근처에 있는 '1933 라오창팡(老场坊)'은 1933년에 지어진 외국인 대상의 거대 도살장이었다. 하루에 천여 마리의 소, 돼지를 잡던 이곳은 지금 상하이를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옛 건축물의 골간을 유지한 채 세련된 조각 작품들을 배치하고 갤러리, 레스토랑, 상가들을 채워놓고 있다.

 

책과 함께 떠나는 도시 여행

   

 
글·지도  이명석

저술업자 겸 도시수집가. 인문학적인 테마를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인문주의 엔터테이너’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여행자의 로망백서],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이 있다.
미투데이(
me2day.net/manamana)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이 코너는 박사와 격주로 연재한다.

출처  네이버 > 지구촌 산책 > 한 장의 그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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