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현장감과 절제된 필법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인상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는 파리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을 보인 화가 마네. 대표작인 <풀밭위의 식사>는 마네에게 첫 스캔들을 가져왔다. 살롱에 출품했다 낙선한 그의 작품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열린 낙선전에서 다시 공개됐다. 이에 관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 작품에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마네는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했다.
미술관에서 배운 그림
마네의 회화수업은 쿠튀르의 화실에서뿐만 아니라 미술관에서도 이루어졌다. 젊은 마네는 루브르에서 틴토레토의 자화상, 티치아노의 두 작품 <성모와 예수> <주피터와 안티오페>를 베꼈다.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는 훗날 <놀란요정>이라는 작품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마네는 네덜란드의 미술관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1852년에는 마네의 이름이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미술관 방명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 다음해에는 여느 화가들처럼 이탈리아 ‘순례길’에 올라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마네와 외젠 두 형제는 훗날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장관이 될 에밀 올리비에를 수행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마네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베낀 것도 피렌체에서였다.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10년 후, 마네의 <올랭피아>에 불경스러운 자태로 등장하게 된다.
지극한 현모양처, 마네의 부인 수잔
1863년 10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에 마네는 수잔과 결혼한다. 수잔은 마네의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그를 내조하는 사랑스러운 배필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녀는 마네의 삶에 안정감을 주었고, 음악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났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녀는 당대의 음악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1870년 파리가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되는 바람에 떨어져 지낸 동안 마네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애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마네는 수잔의 풍만한 여체를 우아한 부인의 자태로 그렸다. <피아노 앞에 앉은 마네 부인>에서는 그녀의 평온한 얼굴과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독서>에서는 자식에 대한 무한한 모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대중들의 관심 속에 열린 낙선전
1863년 5월 15일, 전람회장 옆의 부속건물인 산업관에서 유명한 낙선전이 열린다. 보드리의 <진주파도>,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이 2개의 누드화에 대중들과 비평가들이 집중했다. 낙선전을 보기 위해 첫날 7000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마네의 작품도 그 안에 걸려 있었다. <목욕>을 중심으로 양옆에 <마요 옷을 입은 청년>과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이 배치된 마네의 3부작을 보고 비평가들은 마네가 선택한 주제에 한 번 놀랐고, 그의 기법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비평가 중 하나는 “마네가 데생과 원근법을 배우고 나면 그의 재능도 빛을 볼게 될 것이고, 이렇게 퇴폐적인 주제를 버린다면 우리도 그의 기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득한 우정, 마네와 모네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세잔은 마네를 무척 존경했고, 르누아르와 바질도 마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마네와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은 모네였다. 마네는 미래의 인상주의 대가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대로 표현해 낸다. 마네는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에 친형제 같은 모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마네는 훗날 <베네치아 대운하>를 그리면서 ‘물의 라파엘로’인 클로드 모네와 경쟁을 벌이게 되지만, <아르장퇴유>를 보면 이미 이때부터 사람들이 경멸의 뜻으로 인상주의라 칭한 모네의 기법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75년 샬롱전에서 선보인 <아르장퇴유>는 인상파들의 자연주의 화풍을 확인시켜 주었고, 새로운 현대미술의 선언이었다.
진실만이 그림을 살린다
정원에 모델을 세우고 바구니에서 세탁물을 꺼내 짜는 장면을 잡은 <빨래>. 심사위원들은 당시의 대담한 두 흐름인 인상주의적 필치와 자연주의적 주제를 한데 모아놓은 이 그림이 못마땅했다. <빨래>가 낙선하자 게르부아라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던 화가인 마르셀랭데부탱을 그린 <화가>라는 작품을 내놓게 된다. 그러나 <화가>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자신의 화실에서 직접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초대장에는 금색의 글자로 “진실을 그리고, 진실을 말하게 하라.”라고 적혀있었다. 그의 화실에는 매일 400명이나 되는 관람객들이 몰려들었고 신문도 소식을 크게 전했다.
그림을 그릴 때 그는 매번 생기가 넘쳤고 자신의 일을 즐겼다. 마네는 경박함을 피하면서 무겁지 않은 그림을 그렸고, 변함없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침없는 남자가 바로 마네의 또 다른 이름이다.
⊙ 출처 : 금호건설 웹진 어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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